미술이론

하이데거의 예술의 근원 (예술철학)

장쌤 미술 2008. 12. 17. 06:46

* 레포트 제출용으로 저의 소논문을 재인용하지 않길 바랍니다.

 

 

 

 

 

하이데거와 데리다 

 

 장세비

 

 

 

Ⅰ. 서론

 

하이데거의 <진리의 신전>과 데리다의 <회화속의 진리>를 알아보고, 예술 작품의 진리가 어떠한 입장에서 전개되고 주장되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Ⅱ. 본론

 

 

Ⅱ-ⅰ마르틴 하이데거- 진리의 신전

 

 

‘하이데거’은 해석학을 존재론으로 끌고 간 인물이다. 인식론적인 해석학을 존재론적 해석학으로 바꾸려는 역할을 하였다. 철학적 존재론의 실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저술을 함으로 그의 사상 초기부터 계속 되어온 존재에 대한 물음을 철저한 논리와 반성을 무기로 심도 있게 펼쳐 나갔다.

 

고흐의 작품 [구두]을 플라톤의 국가론에 따르면, 구두의 이데아를 모방한 구두를 또 다시 모방한 이중모방으로 진리에서 멀어진 환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플라톤과 정반대의 방향에서 그림은 진리와 상관이 있으며, 그림에서 진리가 드러난다고 보고 있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유럽 형이상학의 역사는 존재의 의미를 물어온 듯 보이지만 실상은 존재를 존재자로 대치시켜 이해한 ‘존재 망각’의 역사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차이”를 강조하면서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묻고 있다. 그에게 진리란 존재의 드러남을 뜻하며, 그림에서처럼 예술작품에서 진리가 드러난다는 것이 진리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즉, 철학은 “근원적인 존재의 체험을 상기하는 것” 즉, ‘존재’을 상기시킴으로서 확장되는 철학이며, 사물(존재자)의 의미를 실천적으로 해석하는 실존적 주체로서 ‘현존재’라는 규정,

 

 

새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주는 근원적 진리로서의 “개시” 이른바 ‘존재론적 차이의 사상’

을 이루는 이 요소들이 [근원]에서는 “진리가 발생하는 탁월한 방식 중의 하나” 라는 고흐의 작품 [구두]를 예로 미학적으로 다시 한 번 확증된다.

 

 

하이데거의 진리는 존재자의 존재를 열어 보여주는 근원적 진리이지만, 샤피로에게 예술 작품의 진리는 재현이며, 모방, 복제의 진리이다.

 

샤피로의 해석은 실재하는 구두에 의뢰하기 때문에, 그림은 그것들을 모방하고 재현하고

복제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다음에 그것들은 어떤 실재하는 주체 혹은 실재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주체에 귀속되어야 한다.

 

 

[근원]은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성립하였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작품을 하나의 미적 관조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미학은 철저히 형이상학에 토대를 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의 비판은 ‘샤피로’ 가 말하는 진리와는 정반대의 개념이며, 철저한 “전복”의 결과이다. 예술 작품을 대하는 태도를 변화하여 예술을 “미적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진리가 발생하는 방식”으로 대하는 것을 말한다.

 

 

하이데거는 ‘예술’을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공동 근원으로 삼는다.

 

 

예술은 예술가의 주관성의 표현이 아니며, 좀 더 깊은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본다. 하이데거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묻기 위해서는 그것이 예술작품으로부터 해명이 되어야 하고, 예술의 본질을 해명함으로써 하이데거의 미학은 예술가 미학이 아닌 작품미학의 성격을 띠게 된다. 예술작품은 사물적 측면을 갖고 있는데, “사물적 차원을 넘어서는 또 다른 어떤 것”이 예술의 본질을 이룬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은 자기 아닌 ‘다른 것을 말하는 것’ 즉 ‘알레고리 allegorie’이자 다른 반쪽을 ‘함께 데려

오는 것’ 즉 ‘심볼 symbol'이라 할 수 있다.

 

 

예술작품은 작품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물이지만, 사물적인 성격만 가지면 그것은 예술작품이 아니다. 예술작품이 알레고리적인 면이나 상징적인 면을 가지는 건 이런 사물적인 성격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예술작품과 예술가는 서로가 서로의 근원이 되는 순환적 관계임을 지적하며 이러한 순환의 근원이 되는 예술의 본질에 대해 탐구를 시작한다.

 

 

하이데거의 사물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 전통적인 방식이 나온다. 첫째, “실체” 개념이다. “사물=실체”라는 규정이다. 두 번째, 우리 감관에 주어진 여러 겹의 감각적 통일체.

즉, “감각에 주어진 다양성의 통합체”라는 것이다. 세 번째, 질료와 형식의 결합이라는 것으로 이 개념이야말로 예술작품의 사물적인 측면을 해명하는데 중요한 정의이다.

 

 

  “사물=질료+형상” 즉 사물이란 “형상화된 질료”라는 것이다. 이 정의는 순수한

사물보다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 즉, 도구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에 더 적합하다.

 

‘도구’와 ‘작품’은 인간에 의해 제작된다는 점에서 비슷하나 작품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도구와는 다르다. [사물-도구-작품]의 특성을 비교하면서 도구는 사물과 작품의 중간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단순사물과 예술작품, 모든 존재자를 파악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닳아빠진 구두 내부의 어둠 속에서부터 노동자의 고단한 발걸음이 밖을 응시하고 있다.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구두 안에는 황량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한없이 멀고 한없이 단

조로운 밭고랑을 수도 없이 밟고 지나갔을 그녀의 강인한 발걸음이 응축되어 있다...

(중간생략) ... 이 도구는 대지에 속해있고, 농부 아내의 세계 가운데서 보존되고 있다.“

 

 

  이 글에서 농부 아내의 “세계”가 여기에 의지해 드러나게 됨을 보여준다. 즉 구두에 대한 그녀의 “믿음”을 하이데거는 “신뢰성” 이라고 부른다.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도구를 도구로 만드는 신뢰성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구두의 ‘도구존재’, “도구의 도구존재”가 밝혀지므로 우리는 진정 존재자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며, 예술작품은 사물이 진실로 어떻게 존재하는지 열어 보여줄 때 예술작품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작품 내부에서 진리가 일어난다고 표현한다. 

 

 

  존재자와의 일치가 오랫동안 진리의 본질로서 간주되어 왔다...(중간생략)... 우리는

그 회화가 현실적인 것에서부터 하나의 모방을 끄집어 내어와 이것을 예술가가 생산

하는 하나의 생산물 속으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재현의 진리는 묘사대상이 되는 존재자와의 일치에 있다. 하지만 고흐의 [구두]속에서 일어나는 진리는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 속에 스스로를 정립시키는 것”으로 “현시의 진리, 개시의 진리”이다. “작품의 진리는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차이에 관한 진리이다.”

 

하이데거는 그리스 신전을 통해 “세계”와 “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신전을 세움으로 신을 ‘존재’하게 하고, 그것을 통해 그리스 민족이 거주하는 세계를 열었던 것으로 하이데거는 “세계의 건립 Aufstellen”이라고 한다. 세계는 개별적 존재자처럼 대상화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존재자들이 각각 존재로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터(관계, 지평)를 의미한다. 그 세계 안에서 존재자들의 삶이 영위되고, 자연으로부터 퍼올려 삶의 터전이 되는 대지를 놓고(대지의 드러남을 하이데거는 “대지의 설립 Herstellen"이라고 함), 그 대지위에 민족적 삶의 세계를 세운다.

 

작품의 존재란 “하나의 세계를 건립한”는 것을 의미한다. 질료를 소멸시키지 않고 질료가 질료 자체로서 나타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작품에 있어서 세계가 건립됨과 동시에 모든 존재자가 뿌리내리고 있는 대지가 그 세계 안에 떠오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계와 대지의 관계를 “하이데거는 ‘투쟁’과 ‘안식’이라는 모순적 용어로 포착한다. ”

무언가를 개시하는 세계의 건립과 반대로 대지의 설립은 무언가를 은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와 대지가 투쟁하는데, 세계는 무언가를 자꾸 열어 보이려고 하고, 대지는 감추는 것으로서의 대지로서 드러난다.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이게 하는 것은 바로 이 투쟁이다.

 

세계와 대지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전통적 개념을 대처하는 새로운 예술작품의 존재론을 이룬다. 하이데거는 데카르트 세계관을 전복하며 인식론적 관계에서 세계와 현존재 사이의 실존적 관계로 세계를 존재자의 총체로 본다. 인간은 모든 사물을 실천적 관점에서 해석하며 살아가는 “현존재”라 부른다. 동물이나 식물은 진정한 의미의 세계를 갖지 못하고 오직 현존재(인간)만이 가질 수 있다.

 

 

근대미학은 예술을 존재자의 재현으로 본다. 예술작품이란 “존재자의 진리가 자신을 작품 속에 정립하는 것”이다. 이 정의에서 진리는 스스로 주체이자 객체가 된다. 주관-객관이라는 도식 자체는 이미 하이데거가 극복한 상태이기 때문에 근원적 진리는 주객의 구별에 선행한다. 이렇게 진리개념이 새롭게 세워지면서 기존의 미학에 대한 태도, 창작자의 표현으로서의 예술, 존재자의 정확한 재현으로서의 예술, 혹은 감상자가 정서적인 감동을 받는 것으로서의 예술이라는 개념이 해체가 된다. 예술가는 작품의 생성을 위해서 쓰이는 일종의 영매(“통로”)와 비슷한 존재이다.

 

 

‘아무개가 만들었음’이 널리 알려져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단순한 ‘사실이 있다’가

작품 속에서 열린 장 안으로 견지되어야 한다.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은 근대의 예술가 미학이 아니라 탈근대적 작품미학의 성격을 띠게 된다. 예술 작품은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 속에 정립되는 것’이다. 또한, 하이데거는 예술적 수용의 본질을 기술하기 위해 ‘보존’이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보존’이란 진리를 진리이게끔 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작품 속에서 진리를 창작하는 보존”이 예술이다.

 

 

근대미학에서 미와 숭고를 구별하는 척도는 인간 주체의 인식능력이었다. 즉 인간의 인식능력에 의해 파악된 비례, 균형, 조화 등을 의미했다. 하지만 미적 주체성이 파괴되면서 아름다움을 규정할 수 있는 척도는 사라지고 하이데거가 ‘미’를 “작품 속에서 진리의 빛남”이라고 한다. 하이데거의 미는 작품을 통한 진리체험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하는 숭고 체험을 가리키고 있다.

 

 

하이데거의 미학비판은 동시에 근대의 미적 예술문화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근원]을 쓴 하이데거의 최종 목표는 “예술을 대하는 현존재의 근본 태도의 변화”를 준비 하는 데에 있었다. 예술을 미적 대상이 아닌, “진리가 발생하는 방식”으로 대하는 데에 있다. 작품을 작품이게 하고, 진리를 진리에게 하는 이런 태도를 하이데거는 ‘보존’이라 했으며,

보존하는 자 없이는 창작된 것 자체 또한 존재적이 될 수 없다.” 라고 본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과 시와 언어는 근원적 진리의 일어남이다. 반면 과학은 “진리의근원적 개시”가 아니라, 사후에 예술과 시와 언어가 열어 준 “영역을 정비”하는 데에 불과하다고 한다. “진리의 근원적 개시”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존재자의 존재”를 보게 해주는 것이며, 예술작품이 그리스의 신전처럼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 - 신으로 표상되는 어떤 역사적 민족의 세계-“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미학비판은 서구 형이상학을 비판한다. 예술은 “작품 속에 진리의 정립”으로 작품 속에 스스로를 정립시키는 것으로 정의한다.

 

 

 

 

Ⅱ-ⅱ 자크 데리다 - 회화 속의 진리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에 따르면 고흐의 [구두]는 농촌 아낙네의 구두가 아닌 대도시의 거리를 다녔던 구두로 주장한다. 작품의 제작 연대를 근거로 추정한 것이 사실이라면 하이데거의 철학은 우스갯소리로 전락하고 만다. 하이데거의 ‘대지’가 나치즘에 의한 정치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진다면 대지와 농민의 이데올로기를 사피로는 비난하려 했을 것이다.

 

 

[진리]에서 데리다는 구두가 한 켤레라는 사실을 의심하고 각각 다른 구두에 속하는 왼쪽 신발들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일종의 페티시즘으로 보았다.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 그림앞에 선 자기에게 그림이 해준 말이라는 것”에 데리다는

샤피로를 따라 그 구절이 하이데거의 주관적 “투사”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한다. “

 

샤피로의 결정적인 오류는 하이데거의 논증을 완전히 잘못 이해했다는 것이다.

진리의 작품 속으로의 정립으로서의 예술은 실재를 베끼는 모방이나 묘사도 아니며, 개별적

사물이나 일반적 본질을 재현하는 복제도 아니다. 반면 샤피로의 해석은 실재 구두에 의뢰

하기 때문에, 그림은 그것들을 모방하고 재현하고 복제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다음에 그것

들은 어떤 실재하는 주체 혹은 실재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주체에 귀속되어야 한다.

 

하이데거의 진리는 존재자의 존재를 열어 보이는 개시로서의 진리이다. 그러나 샤피로의 진리는 재현이며 모방, 복제의 진리이기 때문에 하이데거의 철학을 비판한다.

 

 

  하이데거에 대한 샤피로의 초점이 빗나간 비난은 “세 가지 도그마”에 기초해 있다.

첫째, 그려진 구두는 확인할 수 있고 명명할 수 있는 ‘실제의 주체’에서 귀속 될 수 있다.

둘째, 그려진 것이든 실재하는 것이든 구두는 구두이며, 발에 조응한다.

셋째, 그 발은 그려진 것이든 환영이든 실재하든 발이든 어떤 육체에 속한다.

샤피로는 그림의 제재를 밝히고 그것의 소유주를 찾아 그것을 특정 주체에 귀속시킨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구두가 신발이 놓인 공간의 ‘불특정성’과 신발이 아낙의 것이라는 ‘특정’사이의 모순을 ‘징후적 모순’이라 부른다. 샤피로의 “명백히, 분명히”와 같은 단언과는 달리 하이데거는 의심의 여지를 남겨 놓는다. “ 아마도 이 모든 것은 우리는 그림속의 구두에서만 보는지도 모른다”고 한 뒤 진리의 근원을 촌 아낙네의 현존재에서 찾기 때문이다.

 

  샤피로는 하이데거가 가장 중요한 측면을 놓치고 있다고 본다. “개인적, 상모적”인 측면인데, “작품 속에 예술가의 현존” 즉 그 그림 안에 실은 작가 자신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하이데거는 보지 못했다. 그림속의 구두, 화가의 다른 자아의 모습, 즉 예술가의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구두를 농촌 아낙네의 발을 통해 대지로 내려가고, 샤피로의 구두는 화가의 얼굴을 향해 상승한다.

결국, 샤피로의 해석은 예술가의 주체성으로 환원시켜, “자의식의 표현”을 해석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근대적 병적 징후”로 읽으며 문제 삼았던 부분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예술가는 작품의 생성을 위해 영매(통로)로서의 입장이다. 작가라는 ‘통로’를 통해 작품속에서 열리는 탈은폐라는 현전의 미학인 것이다.

 

 

“샤피로의 해석은 철저하게 근대적 형이상학의 틀에 머문다. 작품을 현실 속에 존재하는

대상의 ‘모방’으로 바라보고, 그 대상을 주체로 귀속시키고, 나아가 작품을 작가의 자의

식의 표현으로 바라보는 것, 이것이 ‘주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 위에 서 있는 근대미학

의 특징이다. ”

 

 

  샤피로의 해석이 주인을 찾아 그것을 주체에 귀속시키는 것이라면, 하이데거는 구두의 주인이 아닌, “현존재(세계 속의 인간)의 상관자로서 도구존재의 진리를 드러내고 그 진리를 작동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이렇게 두 사람의 관점은 달라도 결국 작품은 하나의 “궁극적인 의미”를 지향한다. 두 사람은 구두를 “짝”으로 단정함으로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데, 구두가 ‘쌍’이 아닐 때 구두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낡은 재현론을 대체할 새로운 시뮬라크르의 미학을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아르토는 샤피로가 구두 안으로 고흐를 돌아오게 하고 유령을 모시는 것에 항의 하며 그것은 “불필요한 해석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작품 자체에 귀를 기울이라고 한다.

 

 

그것은 방금 떠났다. Ca vient de partir

떠나려고 돠돌아온다. Ca revient de partir

방금 다시 떠났다. Ca revient de partir

 

 

데리다의 작품의 진리는 결코 작품에 한번에 현전하지 않는다. 예술 작품의 진리는 존재하면서 동시에 부재한다. “은폐이자 동시에 탈은폐”라는 하이데거의 진리개념과 만나게 된다.

데리다의 사유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작품의 진리를 단 한 번의 해석으로 현전 시키려는 독단을 범하는게 아닌지 의심한다.

 

 

데리다는 “존재하는 것은 기표의 놀이” 로 존재하는 것은 차이 속에서 의미를 연기하며 자신의 의미를 끝없이 다른 시니피앙들에게 연기시키며 산포되는 그리하여 현전에 도달하지 않는 텍스트들의 놀이뿐이다. 예술은 더 이상 현실의 재현이 아니다. 예술이 모방해야 할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방의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정적 해석도 있을 수 없다.

 

  여기서 “해석학과 해체론”의 묘한 관계가 발생한다. 하이데거가 해석학을 이어받아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그 해석들의 적절성을 가릴 기준을 찾았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체론’은 하이데거의 근대 형이상학을 벗어나서 ‘현전’(도구존재의 드러남)에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나,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라는 하이데거의 사상을 받아들여 그 ‘존재’의 정학을 니체의 시각에서 ‘생성’으로 역동화 하였다. 데리다는 고흐의 작품이 하이데거를 만나 하나의 진리를 열어주듯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진리를 열어 줄 수 있다”고 보았다. 즉 하나의 예술작품이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해석자와 만남에서 다양한 해석의 시각들을 생성해내는 예술 작품의 미적 창조력, 바로 거기에 예술 작품의 진리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술작품은 “해석학적 대상”이 아니라 “개념화 될 수 없는 것의 보존”이라는 것이다.

 

 

  앵포르멜은 액션페인팅과 같은 추상표현주의와 비슷하나 액션페인팅이 그리는 행위에 주목한다면 앵포르멜은 행위로 인해 남겨진 흔적 “물질적 흔적”에 강조한다. 데리다에게 의미 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관념’이 아니라, ‘기표’라는 기호 매체의 ‘물질성’이다. 앵포르멜에게 중요한 것은 재현이 아니라 질감(물질적 바탕)이었다. 흔적, 자국, 산포, 의미의 연기 등을 강조하는데, 기호작용에 관한 데리다의 사상은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Ⅲ. 결론

 

 

  유럽의 형이상학운 존재를 존재자로 대치시켜 이해한 존재망각의 세계(자아의 망각)였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존재, 존재자의 존재론적 차이를 강조하며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하였다.

특히 예술가는 ‘존재자’에서 벗어나야 하며 ‘존재론적 세계’에 있어야 한다. 진리에 대한 물음은 “존재의 드러남”을 뜻하고, 예술작품은 작품이기 전에 사물이지만, 사물 그 너머에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사물 - 도구 - 작품의 특성을 비교하여 도구의 도구존재를 밝혀내고, 예술작품은 사물이 진실로 어떻게 존재하는지 열어 보일 때, 예술작품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작품 내부에서 진리가 일어난다고 표현하였다.

 

  진리가 일어남을 개시로서의 진리로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 속에서 스스로 정립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예술은 세계와 대지의 건립 즉, 작품에 있어서 세계가 건립됨과 동시에 존재자들이 뿌리내리고 있는 대지가 영위되고, 작품을 통해 세워지는 드러나는 투쟁관계로 묘사했다.

작품은 존재의 탈은폐와 은폐를 구체함으로써, 대지를 세계 안으로 드러내는 형태로 구체화하는 투쟁으로 보았다. 근대학은 예술을 존재자의 재현으로 보는데 하이데거의 진리는 “존재자의 진리가 스스로를 작품 안에 정립하는 것”으로 정의하며, 진리를 진리이게끔 하는 역할을 ‘보존’이라고 표현함으로 전통과 반대되는 미학의 전복을 시도하였다

 

 

샤피로의 미학은 실제하는 것에 의회하고 그것들을 모방하고 재현하고 복제하는 것으로 상정되는 재현의 미학, 경험의 미학이라면, 하이데거의 미학은 탈은폐라는 현전의 미학에 속한다. 샤피로가 그림의 제재를 소유주에 귀속시키고, 어떤 확실함을 강조하려 하였으며, 작품 속에 예술가의 현존, 즉 그림 안에 작가 자신, 화가의 다른 자아의 모습, 예술가의 자화상이 들어가 있다고 보았다. 일종의 화가의 “자의식”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결국 작품을 예술가의 주체성으로 환원시켜, 그것을 그의 자의식의 표현으로 만들었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근대의 병적 징후”로 문제 삼음)

 

 

  데리다의 작품의 진리는 작품 속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부재하는, 존재하는 것을 기표의 놀이로 보았다. 즉,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해석들의 적절성을 가릴 기준을 찾는 것이다. 데리다에게 예술작품의 진리는 단 한번에 종국적으로 현상되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또 다른 진리를 열어 줄 수 있는 것으로 “개념화 될 수 없는 것의 보존”이다.